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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연구총서’ 집필자회의 개최 등록일: 2014.10.31

‘아산연구총서’ 집필자회의 개최

 

정주영 탄생 100주년 기념, 아산정신 조명하는 ‘아산연구총서’ 내년 발간
정몽준 이사장, 정진홍 아산리더십연구원장을 비롯한 각계 원로 70여명 참석

 

 

정몽준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은 30일(목) 오후 4시 종로구 신문로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정진홍 울산대 아산리더십연구원장 등 ‘아산연구총서’ 집필자와 정주영 명예회장님과 함께 했던 각계 원로 70여 명을 초청해 ‘아산연구총서’ 집팔자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아산의 업적과 정신을 연구하는 아산리더십연구원은 정주영 설립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대한민국 경제와 사회복지 발전을 이끌어온 아산 정주영의 정신과 가치관 등의 내용을 담은 ‘아산연구총서’를 발간할 계획입니다.

 

‘아산연구총서’는 아산정신의 기조, 아산의 경영과 그 원천, 아산의 경제와 노동, 아산과 국가, 아산과 인간존중, 아산과 미래 등 총 6권으로 구성되며, 아산의 업적과 성취 및 내면의 원동력을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아산연구총서’는 각 권 집필자의 원고 작성과 심사, 수정보완 등 집필 과정을 거쳐 2015년 10월 발간될 예정입니다.

 

 

<정몽준 이사장 만찬사>

 

바쁘신 가운데에도 참석해주신 교수님들, 아버님의 지인분들, 현대를 이끌어 오셨던 원로 경영인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실제로 집필을 하면서 연구총서 준비를 해주시는 정진홍 울산대학교 아산리더십 연구원장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가족들이 더 많이 와서 들어야 하는데 못 온 것 같아서 아쉽고 송구합니다. 

 

내년 4월에 집필이 마감되고, 심포지엄을 하고, 책이 출판되는데 이를 위해 준비해 주시는 여러 교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말씀들을 들으면서 생각나는 일화가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제가 생각해 보면, 산업적인 측면만을 놓고 봤을 때, 아버님께서 자동차 산업과 조선 산업을 하셨는데, 이 두 산업은 다 우리나라의 많은 학자들, 또 정부에서도 잘 될 리가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동차 산업은 박병재 부회장님이 좋은 말씀해 주셨는데요,
기억하시는 것처럼 일본의 경우에도 197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정부와 학자들은 일본의 자동차산업이 성공할 리 없다 이렇게 말했어요. 이러한 이유로 해서 일본은 정부 주도로 자동차 산업의 통폐합 작업을 두 세 차례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에 우리나라에서도 자동차산업이 성공할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1980년 우리나라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산업통폐합을 추진했던 것 기억하시죠? 중화학공업을 하나로 묶고, 자동차를 하나로 묶고….  
제대로 된 나라라면, 해당 기업인을 불러놓고 당신 회사는 둘 중에 하나, 뭐 할래? 이렇게 물어볼 수가 없는 일이죠. 
그때 아버님께서 정부가 발주하는 발전소 공사하겠다고 중화학을 선택했으면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은 지금 있을 수 없었을 거예요. 

 

88올림픽도 많은 분들이 안 될 거라고 했는데요. 
제가 아버님을 모시고 바덴바덴에 갔는데, 그때 이병규 회장님도 계셨는데, 벨지움에 가서 전경련 주최 세미나를 하고 런던에 갔어요.
그 당시 국무총리께서 유럽에 가서 IOC 위원을 만나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신청하면 전망이 어떨까 해서 한번 다녀오셨어요. 다녀오신 전망은, IOC 위원은 거의 만나지도 못했기 때문에, 절대로 안 될 거라는 겁니다. 

 

아버님 모시고 벨지움 갔다가 런던에 갔는데, 운이 좋아서 영국 IOC 위원 두 분을 모시고 점심 식사를 하게 됐어요. 제가 통역을 했나 그런데, 분위기가 아주 안 좋았습니다. 
바덴바덴에 들어간 게 81년이었는데요. 81년이 어떤 때인가 하면, 박정희 대통령께서 79년에 돌아가시고 80년에 우리 정부는 야당총재에 사형을 선고한, 외국에서 볼 때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후진국이고, 경제적으로는 일본한테 저리로 차관을 달라, 쉽게 말하면, 경제적으로는 파탄이 난 나라가 올림픽을 신청한다고 하니까, 택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아버님과 영국 IOC 위원 두 분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하는데요, 분위기가 아주 안 좋았습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상대할 가치가 없는 나라였습니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는데 그 영국 IOC 위원 두 분이 연세가 거의 아버지와 비슷해요. 
연세도 많으신 분들하고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중 한  분의 첫 번째 질문이, 저희 아버님 보고 “당신이 유치위원장이라는데 당신이 언제부터 스포츠에 대해 관여하였는가?”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님이 “이거 맡으면서 처음이다” 그러시니까 얼마나 냉소적인 분위기가 되었겠어요. 점잖게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아버지께서 용기를 내서, 제가 보니까 심호흡을 한번 하시던데, “스포츠와 정치는 분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Sports and politics should be separated”) 대충 이렇게 얘기 한 것 같아요.

 

그건 좋은 이야기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기다렸다는 듯이 “스포츠와 정치는 분리해야 한다는 그 말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그러더라고요. 
그때가 1981년인데 당시 국제정치 상황은 꽤 복잡했습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쳐들어가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이 동참해서, 서방세계에서 보이콧을 했잖아요.

 

당시 영국 IOC 위원들이 정치와 스포츠는 분리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우리는 모스크바 올림픽에 간다” 이렇게 발표 했더니, 

영국정부가 무슨 소리냐, 소련이 지금 아프가니스탄에 쳐들어가서 우리는 올림픽에 참가할 수 없다, 하면서 영국정부가 재정 지원을 안 해 영국의 체육인들은 모스크바 올림픽에 참여하기 위해서 길거리에 나가서 성금을 모으느라고 고생을 엄청나게 했데요. 

당신 조금 전에 그 말했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아느냐 그러면서 몹시 기분이 나쁜 표정인 거에요.

 

아이고, 오늘 일진이 안 좋구나 생각하고 밥이나 먹고 아버님 모시고 가야겠구나, 생각하면서 밥을 다 먹고 디저트가 나왔을 때 쯤 아버님께서 한번 심호흡 하시더니 한 말씀 하시더라고요.“올림픽 정신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셨어요.

 

아까 그 사람들이 언제부터 올림픽에 관여 했느냐고 이렇게 시비를 거니까, 올림픽 정신이 뭡니까?  Olympic spirit가 무엇이냐고 그러시길래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시나 했습니다.

 

일본은 1964년에 하계 올림픽을 했는데, 올림픽이 아시아로 돌아 왔는데 왜 또 일본이 하느냐? 아시아에는 일본 하나 밖에 없느냐? 그게 올림픽의 정신에 맞느냐? 그야말로 순수한 질문을 한 거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생각을 하더니 그거 말 되네 하는 거예요. 아버님이 조금 힘을 내셔서 일본이 이번에 올림픽을 하면 두 번째인데 일본의 주력 산업, 제철, 조선, 그리고 자동차는 더욱 발전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당신들이 바라는 것이냐? 이러한 3대 산업은 영국이 주도하다가 일본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뜻이냐고 거꾸로 물어보는 것이에요. Japan is not the only country in Asia 그러니까 왜 일본만 시키느냐 그랬더니 그 분들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turn on이 되면서, 귀가 번쩍 뜨이시면서, 바덴바덴에 가면 어느 호텔에 묵을 것이냐 그러면서 바덴바덴에 가면 연락하라고 그러시더라고요.

 

IOC 위원들이 묶는 호텔은 들어가려면 IOC 위원들이, 내가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 들어갈 수 있는데 그사람들 덕분에 저희들이 IOC 호텔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 건설업을 하실 때 아버님의 회사는 그렇게 큰 회사가 아니였어요. 그런데도 그때 공사라는 게 정부발주 공사밖에 없어서 자유당 정부 때 4인방이라는 단어가 있었어요. 건설회사 큰회사 4개를 지칭하는 부정적 단어였습니다. 아버님의 회사는 작아서 거기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런 이야기 듣기 싫어서 외국 가서 공사 하겠다. 그렇게 생각 하신 게 계기가 되어서 69년 알라스카에 가서 허리케인 계곡의 교량건설 공사를, 70년에는 파푸아뉴기니에 가서 지하 화력발전 공사를 했습니다. 이 단어가 정확하다면 지하에 화력발전을 짓는 건데요. 69년과 70년, 이때는 대한민국에 영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때이고요. 거기가면 노동법이 다르고 관련법도 다르고, 교통과 통신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고생을 사서 하신 것입니다.

 

저도 아직 파푸아뉴기니를 가보지 못했습니다. 아버님이 그 옛날에 공사를 하시느라고 고생하셨기 때문에 저도 꼭 가야겠다고 했는데, 제가 이 말씀 드리는 이유는, 알라스카는 가보신 분들 있을 것 아니에요. 파푸아뉴기니 가실 분들, 교수님들 중에서 파푸아뉴기니 한번 가보시자고 그러시면, 저희들이 한 번 모시고 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비행기는 비즈니스석은 못 드리고요. 제가 같이 이코노미를 타고, 모시고 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거든요.

 

자동차 이야기는 제가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아버님이 일제시대 때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셨다네요. 수리공장을 하실 때 돈 꿔준 사람, 사채업자라고 하는데 그 사채업자라는 것은 나쁜 표현입니다. 

 

하여튼 그 분이 돈을 빌려주셨는데 담보  없이 돈을 빌려주었으니 신용대출 해주신 겁니다. 요즘 식으로 좋게 이야기하면 엔젤 투자를 해주신 분이죠.
그분한테 돈을 꾸고 공장 차리고 얼마 안 돼서 그 공장이 불이 났습니다. 비싼 자동차도 다 타고 그래서 다시 그분한테 갔는데, 그분이 하신 말씀이 나는 여태까지 사람보고 돈을 꿔줬는데 한 번도 돈을 떼인 적이 없는데 너 때문에 내 기록에 오점이 생길까 걱정이다, 그래서 내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서 너한테 다시 돈을 다시 꿔줄 테니까 다시는 불내지 말라고 그랬답니다.

 

그 당시는 자동차가 귀한 물건이니까 그리고 부품이란 게 전부 다 기계식(요즘은 전자식)이라서 밤새도록 깎고 붙여서 작업하는 것이거든요. 밤샘 작업을 하는 공장이죠. 

 

그 후 자동차 조립사업을 울산에서 시작하셨는데 미국의 포드 자동차 회사는 우리나라에서 계속 조립생산을 해서 미국의 부품을 팔 생각이었지 우리나라에 완제품 일관 공장을 만들 생각이 없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다니던 시절인데 아버님이 밤늦게 들어오시더니 저를 부르시더니, 갑자기 이러시는 거예요. "야! 몽준아. 너 전 세계에서 제일 구두쇠가 어떤 사람인지 아냐?" 그러시는 거에요. "모르겠는데요." 했더니, "전 세계에서 제일 부자, 그놈이 말이야 제일 구두쇠다." 이러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포드사하고 협상이 그날 결렬된 날인 것 같아요. 

 

그러시면서 독립된 일관 자동차 공장을 하신다고 그랬는데요, 이 자리에는 경제학, 공학 교수들께서 계신데요. 그 당시 현대자동차의 매출이나 이익이 그야말로 도요타와 비교가 안 되죠. 그런데 어떻게 일관 공장을 하냐? 그 당시에 일관 공장이 성공할려면 최소 20만대를 생산해야 하는데, 1970년대 초 당시 현대자동차가 2만대 정도 조립생산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독립된 자동차 회사를 만드느냐, 돈도 없고 준비도 안 되는데, 하며 걱정하시는 말씀을 듣던 기억이 납니다. 일반적으로 말씀드리면, 세상이 워낙 빨리 변해서, 그 당시 20만대를 조립생산하면 독립해서 성공한다고 했는데, 20만대가 50만대가 되고 50만대가 100만대, 지금은 일관 공장으로서 제 발로 서려면 500만대는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당시 독립된 자동차 사업을 한다는 것은 큰 위험부담을 안고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참석하신 분들도 말씀하셨지만 아버님은 조선사업을 시작하실 때 이 사업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습니다. 배가 별거냐, 철구조물을 짓고 거기에 화력발전소를 건설하듯이 엔진을 달면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셨습니다. 당시 현대건설이 화력발전소도 지어보고 건설 사업도 했으니까 해볼만 하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실제로 조선은 영어로 ship building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즉 manufacturing, 제조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학의 조선학과도 Naval Architecture라고 합니다.

 

조선소 건설 당시 자동차를 몰고 가다 겨울 바다에 빠지셨는데, 꽤  시간이 지나서 경비가 오더니 “그 아래 누구냐?” 하니까 아버님이 “누구긴 누구냐? 사람이지!” 하셨더니 기다리라고 해서 겨우 구조되어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서산 간척지 물막이댐 공사를 하실 때, 해체될 대형 유조선을 활용한 ‘유조선 공법’을 만드신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저희가 여기서 봐야 할 것은 책임자로서의 결단과 책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조선은 보통 전체 구조의 3분의 1을 기름으로 채우고 나머지는 공간으로 비워놓거나 평형수로 채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100% 바닷물로 채울 경우에는 선박의 설계 구조 자체가 감당할 수 없어서 유조선이 찢어져, 선체가 쓰러진 상태에서 빠른 속도의 조류에 떠내려갈 위험이 크다는 당연한 문제제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우려 때문에 일부 회사분들은 최종 물막이댐 공사를 하는 공사요원들이 다칠 수 있다면서 반대를 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당시 부사장급 임원에게“사고가 생기면 내가 책임지겠다. 하지만 잘 되면 당신이 그만 두라”고 하시고 유조선을 가라앉혀서 물을 막으셨습니다. 그 때 아버님은 바로 그 현장에서 지켜보시는 것으로 책임감을 표현하셨습니다. 성공했지만 그 임원은 그만 두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아버님께서 많은 사업을 하시면서, 이춘림 회장님 등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사업이 잘 되었는데, 마음대로 안 되었던  것이 남북관계와 정치입니다.

 

아버님께서는 고향이 북한이시니까 금강산 개발, 개성공단 사업으로 북한에 자주 다녀오셨습니다. 어느 일요일, 청운동 집에서 아버님과 점심을 함께 했는데 안색이 어두우셔서 무슨 일인지 여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남북관계라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북관계의 개선이 어렵고 정치도 어려운데, 대통령 선거 끝나고 아버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생각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고 단지 뽑히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그 말씀을 생각하면서 마음의 정리를 했습니다.

 

아버님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셨는데, 논어 맹자를 좋아하셨습니다. 이중에서도 맹자를 좋아하셨는데 맹자는 서구식 개인주의 사상을 가졌던 인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에서는 벚꽃이 한꺼번에 폈다가 한꺼번에 지는 것을 좋게 말하는 것 같은데 아버님은 이런 걸 안 좋아 하셨습니다. 현대중공업 벽에 써붙여놓은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고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서구식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버님은 이렇게 각 개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참석해주신 정원식 총리님, 교수님들, 이춘림 회장님과 여러 원로님들, 정의숙 명예 이사장님, 윤후정 명예 총장님, 아산재단의 이사님들 고맙습니다. 

 

 

■ 아산연구총서 필자 및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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