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포커스
제26회 아산상 수상자 선정 | 등록일: 2014.11.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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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아산상 수상자 선정 의료봉사상 김신기•손신실 부부, 사회봉사상 사회연대 은행 등 총 26명(단체) 선정
대상인 아산상 수상 단체에는 상금 3억 원, 의료봉사상, 사회봉사상, 특별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1억 원 등 26명(단체 포함)의 수상자에게 총 7억 3천만 원의 상금이 주어집니다.
올해로 26회째를 맞은 아산상은 1989년 재단 설립자인 아산(峨山) 정주영 초대 이사장의 뜻에 따라 불우한 이웃을 위해 헌신해왔거나 효행을 실천해온 개인이나 단체를 찾아 격려하기 위해 제정되었으며, 사회복지 분야 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 아산상 : 삼양주민연대 안광훈 대표
안광훈 신부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후 가톨릭교회에 전한 첫 번째 메시지인 “교회는 가난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말을 평생 온몸으로 실천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안 신부는 현재 실업문제 해결을 위해 만들어진 서울북부실업자 사업단 강북지부(현 삼양주민연대)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삼양주민연대는 IMF 외환위기 후유증이 심각했던 1999년 설립돼 지역맞춤형 일자리 창출, 가사 및 산모 도우미 사업단, 마을기업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삼양주민연대에서 활동하면서 저소득주민들이 임대주택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솔뫼신용협동조합’ 설립에도 참여했고, 2009년에는 6천만원을 마련해 저소득주민의 병원비, 학자금, 전월세 등을 대출해주는 ‘한바가지’ 소액대출운동을 벌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어려운 이웃을 보살폈습니다.
안 신부는 1941년 12월 14일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서 3남 2녀의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체신부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빼고 가족 모두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집에는 매달 골롬반 회지가 배달됐는데, 어린 시절 그는 한국과 필리핀 선교 얘기가 나오는 이 회지를 보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1965년 호주 시드니의 골롬반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고, 다음해 선교회의 지시에 따라 한국에 왔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습니다. 서울 돈암동에 자리한 골롬반 한국지부에서 2년, 삼척성당 주임신부로 1년 동안 보낸 후, 1969년 정선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정선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여러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고리대금과 사채피해로 고통 받는 정선 저소득주민을 위해 1972년 12월 정선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30명이 100원씩 출연해 3,000원으로 설립된 정선신협은 현재 400억원이 넘는 규모의 금융기관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아픈 자식을 위해 기도해달라는 신자의 연락을 받고, 서둘러 갔지만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아이를 목격하고 병원의 필요성을 크게 절감했습니다. 그는 프란시스코 수녀회에 소외지역 주민을 위한 의료시설 설립을 제안하여 1976년 프란치스코의원이 개원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원은 가난한 주민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했고, 순회진료와 보건교육 등을 통해 정선 주민들의 건강증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안광훈 신부가 도시빈민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1년 서울 목동성당 주임신부를 맡고나서부터입니다. 목동 신시가지 계획이 발표되고 성당 근처 안양천변에 살던 사람들이 용역깡패에 쫓겨나는 모습을 보면서 철거민들과 함께 반대 운동에 나섰습니다.
철거민들에게 목동성당 본당 건물을 빌려줬고, 철거민 대표자들이 경찰에 연행되지 않도록 울타리가 되어주었습니다. 또 1984년에는 골롬반외방선교회에서 도와준 1천만원을 종잣돈으로 안양천변 철거민 100가구가 모여살 수 있는 마을을 경기도 시흥에 마련했습니다.
이후 그는 성신여대 입구 근처 ‘골롬반신학원’ 원장을 6년간 맡고, 미국으로 출국해 시카고대학에서 성서학을 공부했습니다. 1992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가 김수환 추기경에게 “도시빈민지역 주민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뜻을 전하자, 추기경이 삼양동 지역을 추천해줘 삼양동에서 활동하다가 1998년 선교본당이 설립되면서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재개발 철거지역에서 전셋집을 구해 혼자 숙식을 해결했습니다. 성직자로서의 권위를 내려놓고, 도시 빈민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동안 개발바람이 불어 세 번이나 전셋집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안 신부는 자신의 전셋집을 세입자 대책위원회 회의실로 제공하고, 세입자 권리보장과 임시거주지 마련을 정부에 요구하는 등 주민들의 생존권 확보를 위해 힘썼습니다.
안광훈 신부는 “목동에서 처음 재개발 문제를 접했을 때 힘들었지만, 재개발지역 철거민들과 함께 문제를 풀어나갔다”면서 “같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나도 철거촌에 전셋집을 얻어 살면서 지역주민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고 말했습니다.
1966년 낯선 한국 땅을 밟은 뒤 48년 동안 빈자를 위해 활동하면서 단 한 번도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같이’의 가치를 믿고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이 권리를 찾고 자립할 수 있게 조력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제26회 아산상 대상 수상 소식을 들은 안 신부는 “상 받을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받게 되어 부끄럽고 미안하다. 상금은 함께 일해 온 분들과 상의해서 소외된 이웃을 돕는 일에 사용하겠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 의료봉사상 : 삼산의원 김신기•손신실 부부
의료봉사상에는 한센인 환자를 치료하며, 그들과 더불어 인생 2막을 사는 ‘왕궁면 화타’ 김신기(남·85세), 손신실(여·79세) 의사 부부가 선정됐습니다. 의료봉사 수상자에게는 상금 1억원이 주어집니다.
김신기, 손신실 부부는 지난 28년 동안 전북 익산시 왕궁면에 한센인을 위해 만들어진 한일기독의원(현 삼산의원) 원장을 맡아 한센인을 치료해왔습니다. 한센인 마을에 있는 병원인데도 ‘명의’로 소문이 나 10여 년 전부터는 전국에서 일반 환자들도 많이 찾아옵니다.
“환자들이 여기 익산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와요. 전라도 여수, 광양, 장성, 충청도 제천, 청주, 강원도 원주…. 서울에서도 온다니까. 이상해. 그 이유를 나도 모르겠어요”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고령에도 진료실을 지키는 김신기 원장의 말입니다.
김 원장은 여든다섯 살, 고령인 탓에 체력이 부쳐 하루 50명만 예약을 받아 진료합니다. 남편과 함께 한센인 환자를 돌봤던 손신실 원장은 관절염이 심해져 걷기가 불편해 2011년부터 진료를 보지 않습니다.
김신기 원장은 1929년 6월 7일 전북 익산에서 4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익산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독립유공자로 ,192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다음해 익산에 삼산의원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김 원장은 1952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공군 군의관과 전주예수병원 일반외과 수련의를 거쳐 1961년 익산에 부친의 병원 이름을 딴 삼산의원을 열었습니다. 아버지 영향을 받은 그는 수련의 시절, 여수에 있는 한센인 생활시설인 예향원에서 5개월 동안 봉사하기도 했습니다.
손신실 원장은 1935년 5월 10일 전남 목포에서 3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1958년 전남대 의대를 졸업했고, 1957년 의대 졸업반 여름방학 때 집안 소개로 김신기 원장을 만나 1958년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병원을 함께 운영하면서 부부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었지만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짙어졌습니다. 장성한 두 아들이 독립했을 무렵, 부부는 필리핀에서 의료봉사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필리핀 치안이 불안했던 터라 김 원장이 평소 봉사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익산시 왕궁면 한센인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김신기 원장은 “의사이자 독립유공자였던 아버지의 삶을 보면서 죽을 때까지 돈만 벌고 세상에 베풀지 않으면 그것이 곧 죄라고 생각했고, 환갑이 넘으면 봉사하며 살자고 아내와 약속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1986년 부부가 한센인을 위해 진료를 시작한 곳은 한일기독의원(현 삼산의원)이었습니다. 1949년 조성된 한센인 정착 농원인 익산농원 산하기관으로 세운 의원이었습니다. 병원에 가면 문전박대 당하는 한센인을 위해 1981년 문을 열었지만, 열악한 환경 탓에 의사들이 오기를 꺼려했고, 오더라도 2년을 못 채우고 떠났습니다.
김신기 원장은 주로 한일기독의원에서 환자를 봤고, 손신실 원장은 농장 안에 있는 양로원에서 환자를 보살피면서 하루 평균 60여명을 진료했습니다. 부부는 농장 운영위원회에서 월급을 받았는데 두 사람이 합쳐서 500만원 정도였습니다.
부부는 한센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상처받은 마음까지 어루만지려고 애썼습니다. 의원을 운영하면서 생계가 어려운 마을 노인을 위해 양로원 운영에 보태줬고, 명절이면 돼지고기 등을 준비해 주민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또한 봉사단체에서 후원을 받아 한센인을 위해 태양열시스템을 갖춘 공동목욕탕을 만들어줬고, 한국전력공사에서 받은 상금으로 마을회관에 심야전기보일러를 설치해주었습니다.
삼산의원에서 사무장으로 일하는 박흥규씨는 “우리 마을에서 김신기 원장님은 없어선 안 될 분”이라며 “모두가 기피하는 한센인의 건강을 돌봐준 것은 물론이고 손을 잡아주면서 따뜻한 말로 위로해줬다”고 말했습니다.
왕궁면 한센인에게 화타 같은 존재인 김신기 원장에게도 한 차례 위기가 왔었습니다. 7년 전 대장암, 심장판막증, 심근경색증을 앓아 진료를 쉴 수밖에 없었으나, 다행히 세 차례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해 2년 뒤 한센인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부부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한센인 환자를 돌보려는 의사가 없어 한일기독의원은 폐원된 상태였습니다. 이번에는 김신기 원장이 한일기독의원 건물을 임대해 부친과 부부가 운영했던 삼산의원 간판을 다시 내걸고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익산시 왕궁면에는 김신기 원장이 운영하는 삼산의원이 유일합니다. 고령인 탓에 김 원장의 뒤를 이어 한센인을 돌봐줄 의사가 필요하지만 한센인에 대한 편견은 20여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돈을 얹어줘도 오려고 하는 의사가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익산농원 박정수 회장은 “김신기 원장님이 투병생활을 하느라 의원을 떠난 후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오려는 의사가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우리에게 은인 같은 두 분이 다시 돌아와 주어서 감사할 따름이다”고 말했습니다.
김신기 원장은 “남은 생 동안 한센인을 위해 계속 진료하고 싶다”면서 “스스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남을 도왔고, 그 일로 이렇게 훌륭한 상까지 받게 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소감을 전했습니다.
■ 사회봉사상 : 사회연대은행
사회봉사상에는 11년간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무보증, 무담보로 창업자금을 대출해주는 한국형 마이크로크레딧을 정착시킨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은행’ 사회연대은행 (사)함께만드는세상(이하 사회연대은행)이 선정됐습니다. 사회봉사상 수상단체에는 상금 1억원이 주어집니다.
사회연대은행은 금융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운 저소득층에게 창업자금을 대출해줬을 뿐만 아니라, 교육과 컨설팅, 지속적인 운영관리를 통해 소상공인의 실질적인 자립을 도와온 점을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마이크로크레딧(Micro Credit)은 ‘작다’는 의미의 ‘마이크로’와 ‘신용’을 뜻하는 ‘크레딧’의 합성어로 저소득 금융소외계층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돈을 빌려주는 제도를 일컫는 용어입니다.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가 ‘그라민 은행’을 설립해 이 제도로 수백만 명의 극빈자를 구제하는데 성공한 바 있습니다.
사회연대은행 김성수 이사장은 빈곤퇴치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무하마드 유누스의 말을 빌려 “빈곤은 테러리즘의 근원이며 따라서 마이크로크레딧을 통한 자립모델은 평화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마이크로크레딧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사회연대은행은 2002년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사회가 빈부격차 확대, 근로빈곤계층과 장기실업자 증가 등으로 심각한 후유증에 맞닥뜨렸던 때, 무하마드 유누스의 정신을 좇아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대안금융’을 모토로 내걸고 설립됐습니다.
지난 2003년 ‘저소득 여성가장 창업지원사업’을 통해 2억 3천만 원을 10개소에 지원하기 시작한 사회연대은행은 정부와 지자체, 민간기업 등으로부터 지원기금을 조성해 지금은 360여 억원을 1,850여 개소에 지원했습니다.
창업자금만 지원하는 유사기관과 달리 사회연대은행은 세무지식, 마케팅 전략 등의 교육과 심리, 법률상담 등의 서비스도 제공합니다. 이러한 지원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11명의 전문가가 매달 1회 이상 가게를 방문해 지속적으로 운영을 돕고 있습니다.
입체적인 창업지원 덕분에 사회연대은행에서 지원받은 가게의 창업 후 5년 이상 평균 생존율은 70%에 달합니다. 외식업의 2년 평균생존율이 약 20%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훨씬 높은 수치입니다.
사회연대은행에서 창업지원을 받은 이모네곱창 김옥연(58) 사장은 “2006년 곱창집 창업을 알아봤지만 신용불량자인 저한테 돈을 빌려주는 은행은 없었습니다. 절망에 빠졌을 때 사회연대은행을 알게 됐고, 2% 저리로 1,500만 원을 빌려 곱창집을 열게 됐다”면서
“지난 8년 동안 지속적으로 위생관리, 고객응대, 조리법, 마케팅 등 컨설팅과 사업점검을 체계적으로 도와줘서 일어설 수 있었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이모네곱창은 블로거들과 식도락가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맛집으로 알려졌습니다.
2007년부터 사회연대은행은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협동조합 등을 대상으로 사회적 금융지원사업도 시작했습니다. 지원 대상을 좁은 의미의 금융소외계층(저소득층)에서 넓은 의미의 금융소외계층(자금조달이 어려운 비영리·사회적기업)으로 확대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104개소에 78여 억원의 기금을 지원했고, 기획, 마케팅, 재무, 인사 등 기업경영의 전반적인 컨설팅과 근로자 역량강화를 위한 교육과 세미나 등 통합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2011년부터는 사회적기업 창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창업에 필요한 공간, 자금, 네트워킹, 멘토링 서비스 등 창업 인프라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270개소에 33여 억원을 지원했습니다.
특히, 사회적기업 지원사업의 혜택을 받은 한 기업은 옥수수전분으로 개발한 컵으로 ‘2012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사회적 기업으로는 최초로 수상하는 등 그 성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2012년에는 대학생들의 고금리 학자금 대출이 사회적 문제로 논란이 되자 대학생 학자금 부채상환 지원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고금리 학자금 대출로 고통 받는 저소득층 대학생에게 최대 1,000만원을 연 2% 저금리로 전환대출해주는 것입니다.
지원받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고금리 대출로 인한 스트레스와 아르바이트 시간이 줄어든 덕분에 학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대학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 학자금 부채상환 지원사업의 경우, 기금 200억원이 소진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하려고 했지만 향후 대출회수금을 활용해 계속 사업을 이어나갈 계획입니다.
사회연대은행 김용덕 대표상임이사는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우산이 필요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겠다”며 각오를 다지면서 “사회봉사상 상금 1억 원을 직원들의 전문성 향상을 위한 교육기금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 복지실천상•자원봉사상•청년봉사상•재능나눔상•효행가족상•다문화가정상 등 23명(단체포함) 수상
복지실천상에는 28년간 복지시설 아동을 헌신적으로 보살펴온 김영분(여·50세) 선린애육원 생활지도과장 등 5명, 자원봉사상에는 23년간 야학교에서 헌신적으로 학습지도 봉사활동을 해온 문종국(남·59세) 강남교육지원청 교육장 등 5명(단체 포함)이 각각 선정됐습니다.
청년봉사상에는 49년간 농촌지역에서 한방의료 봉사활동을 이어온 경희대 한의학과, 간호학과 봉사동아리 ‘녹원회’ 등 4개 단체, 재능나눔상에는 지난 2004년부터 사회적 약자를 위해 무료로 법률지원활동을 펼쳐온 공익변호사 단체 ‘공감’ 등 4개 단체(개인 포함)가 수상합니다.
특히 효행가족상에는 30년간 하반신이 마비된 남편과 네 자녀를 헌신적으로 부양하고 있는 김동숙(여·61세)씨 등 3명이, 다문화가정상에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으로 1995년 결혼하고, 2008년 한국 최초의 귀화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주지강(남·43세)씨 등 2명이 선정됐습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은 수상자 선정을 위해 각계의 전문가로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지난 6월부터 3백여 명의 후보자를 추천받아 예비심사, 서류심사, 현지실태조사, 본심사와 아산상 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수상자를 확정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