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도 좋고 지고도 하하 웃는 산골분교 아이들의 가을 운동회
아침이면 이슬 머금은 풀섶 길을 달려 학교로 오는 숲속의 어린 요정을 만날 수 있고, 학교가 파하면 계곡으로 달려나가 거슬러오르는
물고기와 첨벙첨벙 노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산골 마을. 가을 바람에 만국기가 휘날리는 작은 분교 운동장, 전교생이 서른 명도
안 되지만 여느 학교 못지않게 신나고 즐거운 운동회가 시작되었다.
"깃발이 춤을 춘다 우리 머리 위에서, 우리 편아 잘해라, 저쪽 편도 잘해라."
운동회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을 따라 나무 그늘 아래 자리잡은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박수를 치며 어깨를 들썩인다.
지난 여름 수마가 할퀴고 간 들녘의 아픔을 채 씻어내지 못했어도, 비탈밭 고추·배추가 일손을 놓아주지 않아도, 오늘 하루만은
아이들과 함께 고추잠자리가 되어 파란 하늘 마음껏 날아 보잔다.
산간 마을 조그만 분교 운동장에 온 마을 사람 모두 모여 시끌벅적하다. 아이들이 달리면 엄마·아빠들이 목청 높여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하고, 엄마·아빠들이 달리면 아이들이 일어나 "우리 엄마 이겨라, 우리 아빠 이겨라"
하니, 어느새 운동장에는 백군도 없고 청군도 없다.
네가 잘해서 우리 편이 이겼다며 서로 추켜세우는 아이들, 네가 밀어서 내가 넘어졌다며 싸우는 아이들, 상품으로 받은 수세미와
세숫비누를 서로 바꾸자는 엄마들, 마을 대항 줄다리기에 막걸리 한 말씩을 거는 아빠들.
이겨서 좋고 지고도 하하 웃는, 가을 들판 허수아비 마음 같은 운동회는 지난 밤부터 가마솥에 끓고 있는 곰국처럼 엉기고 풀어져
온 마을 하나되는 대동잔치 마당 같다.
방골 혜림이네 감자 한 포대, 댓골 석배네 배추 스무 포기, 학교 앞 지원네 참기름 두 종지, 웅이네 떡 한 말, 승국이네 머릿고기,
면장님 과자 네 상자, 대대장님 음료수 세 박스…. 각양각색 마음으로 모은 점심상도 푸짐하다.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보다 새소리 물소리가 더 컸던 산골 분교에 오늘은 온 마을 사람들 함께 모여 백두대간 허리춤을 들어올리고
있다. 시오리 산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니느라 힘들었을 아이들도, 여름 뙤약볕 논·밭일에 힘겨웠을 어른들도 오늘 하루는 모든 시름
잊고 신나고 즐거운, 산골 마을 풀꽃 세상.
글쓴이 강재훈은 한겨레21 사진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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