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반 김태승의 편지
유난히 조용한 종례 시간이다.
반 아이들은 방금 내가 나누어 준 1학기 성적표를 보면서 상심(傷心)해 있다. 성적표를 집으로 발송할 봉투에 담으면서 "그렇게
죄송하면 부모님께 편지를 한 통씩 써 넣어라"고 했다.
여기저기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지만 못 들은 척했다. 다음 날 다시 시작해야 할 이 아이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나도 무엇인가
적어 주고 싶어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그중 유난히 눈빛이 반짝거리는 김태승의 편지를 여기에 소개한다.
부모님께
아버지,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 태승이에요.
막상 편지를 쓰려고 하니 좀 쑥스럽기도 하지만 그 동안 마음 속 깊이 아버지, 어머니께 하고 싶은 말을 좀 해보고 싶어서 씁니다.
제 나이도 이제 벌써 16살, 7살에 학교에 입학해서 다른 친구들보다 1살 어린 고등학교 1학년이네요. 하긴 동생 태하, 그
꼬맹이 녀석이 벌써 초등학교 5학년이니 세월이 정말 화살같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 같네요.
먼저 아버지께 한 말씀 올릴게요.
아버지, 저희 가족이 이곳 대전에 온 지가 어느덧 8년이나 되었어요. 거의 10년 동안 아버지께서는 울산 현대 건축 현장에서
근무를 하셔서 2주에 한 번씩만 집에 오시지요. 어렸을 때는 그게 별로 대단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을 안 했었어요. 그냥 평일에
다른 친구들은 다 아버지가 밤에 오시는데 '우리 아버지는 왜 2주에 한 번씩만 집에 오시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아버지께
서운한 감정이 있는 정도였어요.
하지만 제가 나이가 한 살씩 늘어나고 생각이 조금씩 더 깊어질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정말 힘드신 일을 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중3 막바지에 이른 12월쯤에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지요. 매일 저녁 먹을 시간 즈음이 되면 꼭 전화하시던 아버지께서
일주일씩이나 전화를 안 하셨던 때였지요. 그 때 하신 아버지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술 취한 목소리로 저와 태하와
어머니께 너무 서운하다고 하셨지요. 아버지 당신께서 며칠 동안 전화를 안 한다고 해서 저희들도 전화를 안 하냐고 하시면서 막
화를 내셨지요. 그런 다음에 아버지께서는 너무 외롭다고 하셨어요. 아주 우울하고 힘이 없는 목소리로….
그 말을 듣고 나니까 갑자기 아버지께서 집에 2주에 한 번씩밖에 안 오신다는 것이 떠올랐어요. 8년 동안이나 항상 아버지께서
2주에 한 번씩 오시니까 그냥 일상 생활로 느껴졌었고 별 생각도 없었어요. 저와 제 동생의 교육 때문에 그 먼 울산에서 일을
하시는 건데 여태껏 아버지께서 외로우실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 못했다니 너무 죄송스러웠어요. 물론 6학년 때부터 아버지께서 힘드실
거라는 생각은 했었는데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서 제 꿈을 이루고, 아버지께서 해 보고 싶으시다는 세계 일주도 시켜 드릴게요.
이제는 어머니께 말씀드릴게요.
저를 지금까지 키우시느라 정말 힘드셨지요?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늘어나는 어머니의 주름살과 흰머리…. 어렸을 때 저에게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 같은 존재였지요. 아버지께서 평일에는 안 계셔서 아버지의 몫까지 엄격하셨기 때문에 전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무서웠어요.
중학교 때는 너무 제 생활을 구속하는 어머니가 싫었어요. 그래서 반항도 많이 하고 어머니 말씀도 잘 안들었지요.
하지만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알게 되었어요. 중3 기말고사 끝난 때부터 5개월 동안이나 공부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귓등으로 흘려버리던
저는 고등학교 입학 후, 순식간에 떨어진 성적으로 절망에 빠져 있었지요. 중학교 때 벼락치기 공부만 하며 쉬엄쉬엄 했던 전,
고등학교 와서 정말 너무나도 힘이 들고 지쳤었어요.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누구나 다 힘들고 어렵다고 하시면서 격려해 주시고, 떨어진
제 성적도 기억해 두고 더욱 열심히 하라고 위로를 해 주셨어요. 그 때 전 어머니께서 엄하시면서도 누구보다도 저를 사랑하고 아껴주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어요.
어머니, 아버지께 드린 말씀보다 좀 짧게 쓰지만 너무 서운하게 생각은 말아 주세요. 전 두 분 다 사랑하고 감사드리니까요.
이제 남은 고등학교 생활, 정말 알차고 보람있게 보내서 제가 꿈꾸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 갈게요.
잘 지켜 봐 주세요.
그리고 언제나 사랑합니다. 또 감사드려요. 건강히 오래오래 사세요.
그럼 이만 줄일게요.
태승 올림.
글쓴이 임경희는 충남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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