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한 인터뷰어가 만난 행복 권은정


한 인터뷰어가 만난 행복

사람 만나는 사람
인터뷰 기사를 주로 쓰다 보니 자연히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기대로 가슴이 조금씩은 설레는 일이다. 어떤 성품의 사람일까? 솔직한 사람? 마음이 따스한 사람?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나갈 줄 아는 사람? 상대방을 만나러 가는 문 앞까지 나는 언제나 기대를 가지고 간다.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이제는 인사만 한두 마디 나눠 봐도 대강 그 사람의 성품을 눈치챌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것 같다. 하지만 때로는 재빠른 판단이 어긋날 수도 있다. 정말 재미없어 보인다고 생각한 사람이 의외로 솔직하고 진실하게 얘기를 풀어 나가면 속으로 혼자 ‘죄송합니다’를 되뇌인다. 그럴 때는 나의 좁은 소견을 책망하는 게 오히려 기쁘기조차 하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
언젠가 어느 가을날 유방암 병력을 가진 한 부인을 만나 인터뷰했을 때다. 유방암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아 치료가 거의 다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 부인은 곧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아주 아름다웠다. 약사 출신으로 오랫동안 약국을 경영했던 그는 자기 말대로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성격’이라서 다양한 사회 활동도 했다.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정말 본받고 싶은 것이었다. 평생을 살면서 우리 중에 누가 자신에게 병이 찾아오리라 예상하겠는가.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유방암이라고 진단받았을 때 정말 믿기지 않았고 받아들이기 여간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두 차례나 수술대에 올라야 했고 암 환자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죽음의 문턱에까지 가 본 경험을 했다.
“항암 치료를 받기 위해 무균실에 들어가 누워 있었어요. 하얀 벽만 보이는 그 방안에서는 의식조차 하얗게 비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 가운데 문득 내 생애 최고의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재현되어 보이는 것이었어요.”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더란 말이었다. 그 부인은 자신의 생애 최고의 순간은 서른 좀 넘어 일에서나 가정에서나 모든 것에 만족하던 그 시기였다고 했다. 건강했던 그녀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테니스 코트를 누비고 다닌 그 시절이 참으로 행복했다고 말해 주었다.

언제였지?
그 부인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나의 행복한 시간은 언제였는지 스스로 물어보았다. 언제였지? 언제였을까? 혹시 내게는 아직 그런 시간이 오지 않은 것일까? 생각보다 더 오랫동안 나는 그 시점을 짚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난 더욱 당혹스러웠다. 이제까지 살면서 정녕 난 그런 시간이 없었다는 말인가?
그 후 한참이나 더 그 질문에 매달렸지만 쉽게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런 내가 한심해서 나는 거울 앞에 선 채 한참이나 나를 들여다보곤 했다. 내 생애 최고의 시간이 앞으로 올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중에서 언제였을까? 그 시간을 짚어내기 위해 서성이는 동안 나는 결국 나 자신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참으로 교만하고 불평투성이에다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행복한 시간이 왜 없었겠는가.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고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나는 산책을 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은가. 때로는 마음에 드는 옷가지를 골라서 입어보며 즐거워하지도 않는가. 다만 난 그것을 행복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우리는 언제 넓은 집에서 편하게 살아볼까, 언제쯤이면 한 달 월급이 좀 넉넉하다 생각될까, 저기 저 사람들은 저리 능력 있고 유명한데 나는 그동안 뭘 했나? 내가 행복하지 않아 했던 경우는 참 많기도 했다.

앞마당에 있는 것
어리석은 나를 깨우쳐 준 사람들도 내가 인터뷰에서 만난 이들이다. 야간 청소부일을 하면서도 사는 게 정말 재미있지 않아요?라고 내게 묻던 아주머니, 쓰레기차에 올라타 하루 종일 동네 쓰레기를 수거하면서도 ‘눈이 더 나빠지기 전에 책 실컷 읽으며 조합신문을 더 낫게 만드는 게 소원’이라던 환경미화원, 지체장애인이면서도 수화를 배워 언어장애인들을 도와주겠다던 장애인 학교의 여학생. 그들은 정말이지 폼으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젊은 날 나는 ‘행복은 지붕 너머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저 앞마당 바로 거기에 있는 줄 이제 알았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그냥 폼으로 좋아했었다. 이제는 그 말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침 새소리에 일어나며 상쾌한 기분이 들 때, 가족끼리 오랜만에 기차여행을 떠날 때, 슈퍼마켓에서 맛있는 찬거리를 살 때, 행복이 내 안에 있다고 느낄 것이다. 행복은 한 아름 큰 상자에 담겨 어느 날 배달되는 게 아니다. 공기 속에서 햇살 속에서 퍼져나가는 분자처럼 언제나 우리 마음 안에 퍼져 들어오는 것이다.

글쓴이 권은정은 전문 인터뷰어이자 번역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