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담 할미꽃님들의 해맑은 웃음을 떠올리며 한학규 外


땅에서 배운 땀의 의미
아산재단 장학생으로서 장학금을 수여 받은 지 어느덧 3년이 되었다. 대학교 4학년인 나는 이번에 하계 농촌봉사활동의 농활대장을 맡으면서 부담감이 컸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정담회(아산재단 장학생들의 모임)에서 처음으로 다녀왔던 농촌봉사활동은 대학 생활 중 가장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농촌봉사활동을 통해 농촌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고, 같은 장학생이긴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 가운데 1주일 동안 같이 지내면서 서로를 배려하며, 모두 친한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2학년 때 느꼈던 좋은 감정을 이번 신입생들에게도 심어 주고 싶었다.
우리는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명곡리 1구에서 6박 7일(7월 10일~7월 16일) 동안 2003년도 하계 농촌봉사활동을 하였다. 7월 10일 오후 2시, 장학생 30여 명이 재단에 모여 출발했다. 일부 지방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각자 따로 출발을 하여 목적지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모두가 버스를 타고 와서 힘이 들었는지 첫날에는 짐 정리와 숙소 정리만 했다.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일에 들어갔다. 5팀으로 나눠서 과수원, 밭농사, 주변도로 정리, 잡초 제거 작업, 도배 등 다양한 작업을 했다. 저녁에는 각자가 그날 무슨 일을 했는지 설명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주말에는 많은 정담회 동문 선배님들이 오셨다. 동문 선배님들이 과거 농촌봉사활동의 추억담을 이야기해 주셔서 더욱 재미있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일과 후에는 동문 선배님들과 축구도 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요일 저녁에는 마을 어르신들께서 마을 잔치를 열어 주셔서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며칠이 지나자 다들 익숙해져서 그런지 처음보다는 능숙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께서는 우리들이 일하는 것을 보시고는 서로 우리 집에 와서 일을 하라고 하셨다. 다들 이 말에 기분이 좋아서 무더위에 살이 벌겋게 타는 줄도 모르고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농촌봉사활동을 마치기 전날 우리는 모두 파 묘목을 심는 일을 했다. 모두가 한 줄로 넓은 밭에 서서 마을 아저씨의 구호에 맞추어서 파를 심었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힘들었지만 열심히 일을 했다. 재단 관계자 분들도 오셔서 우리를 격려해 주셨다. 그날 저녁에는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삼겹살 파티도 열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들어서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밤이 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농촌봉사활동을 마치는 날, 마을 어르신들은 내년에도 또 오라고 하셨다. 6박 7일간 마을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지만 진정한 땀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이번 농촌봉사활동도 역시나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대학생으로서 마지막으로 참가하게 된 농촌봉사활동을 통해 농촌의 삶을 배울 수 있었고, 정담회원들간에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 2003년도 하계 농촌봉사활동을 무사히 마치게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한학규·경희대학교 4학년


뭐 하노? 같이 춤추자
길다고 하면 긴 시간이고 짧다고 하면 너무나도 짧은 6박 7일간의 농활 생활은 도발 그 자체였다. 처음 농업에 접해보는 이들에겐 너무나 낯선 일과 벅찬 과제들도 있었다. 하지만 농활을 하면서 진정한 땀이 무엇인지, 정담인들이 내게 있어서 어떤 존재들인지 알아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농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도배와 할머니들과 함께 춤을 춘 일이었다.
우선 이틀간 대대적인 작업을 한 도배는 이장님을 따라 혼자 사시는 어떤 할아버지 댁을 방문하는 걸로 시작되었다. 처음 그곳을 보았을 때는 반나절 바짝 하면 충분히 끝낼 수 있다고 여겼으나 그것은 우리의 오만이었다. 7년간 사람의 손을 거의 타지 않았던 터라 모든 일은 우리의 손을 거쳐야 했다. 특히 할아버지 혼자 사시는 곳이다 보니 청소도 만만치 않았다. 좌충우돌하며 우여곡절 끝에 이틀에 걸쳐 드디어 할아버지 댁 도배를 끝냈다. 초보자의 손을 타서인지는 모르나 중간중간 봉긋봉긋 솟은 곳도 있고, 벽지가 우는 곳도 있었지만 우리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가슴이 벅차고 뿌듯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가서 농사일을 도와드리는 것도 좋지만 젊은 사람들이 그리우셨던 것 같다. 우리들이 일을 마치면 같이 밥을 먹고, 밥 먹고 돌아서면 새참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무한히 주려고만 하셨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이 처음 마을에 갔을 때도 너무나 반갑게 맞아 주셨고, 짐을 챙길 버스에 오를 땐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실 만큼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셨다.
이번 농활을 통해 진정한 봉사란 봉사활동 확인서에 도장이나 받으려고 대충 해주고 돌아서는 그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사람이 절실해 하는 것을 채워주고 환한 웃음을 주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도배를 다 끝냈을 때 천만금의 미소를 띠며 격려해 주시고 진심으로 고마워해 주신 할아버지, “같이 춤추자! 뭐하노?”라고 외치시며 우리들과 함께 마을회관 앞마당에서 신나게 노시면서 모든 근심을 잊은 듯 함께 웃었던 마을 잔치! 우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던 공주시 유구마을이 이젠 제2의 고향이 된 듯하다. 길, 밭, 논, 과수원, 집, 벽, 회관 등 모두 우리 정담인의 손을 타지 않은 곳이 없고, 우리들을 모르는 어른들이 없는 그곳. 우린 그곳에서 한층 더 성숙되고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피부로 느끼며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다시 이런 기회가 있다면 좀더 오랫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분들을 도와 드리고 싶다. 오늘도 나는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힘차게 한 발을 내딛어 본다. 일주일간 느낀 뿌듯함과 할미꽃님들의 해맑은 웃음을 떠올리며.
임호정·창원대학교 2학년

파밭 교실
장학생이 되었을 때부터 많은 선배들에게 하계 봉사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던 터라 처음부터 많은 기대를 하고 농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날 길 정리(길 주변 제초 작업과 마을 가운데 정자나무 주변 정리를 했다)로 시작된 농활은 다음날부터 실제 밭농사를 돕는 일로 연결되었다. 대부분은 밭에 자란 잡초를 뽑는 일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먹기만 했던 작물들을 키워내는 데에 이렇게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고, 농활이 하루하루 진행되면서 농촌의 일손이 부족한 현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파밭에서의 일이었다. 농활 기간 중 3일을 파밭에서 일했는데, 처음에는 파밭의 잡초를 뽑는 일로 시작했다. 처음 우리가 일할 밭을 보았을 때 별로 넓어 보이지 않았는데, 일을 하면 할수록 넓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이렇게 하루 종일 허리 굽혀 일해 본 적이 없었는지 모두 너무 힘들어했다.
다음날은 새로 정리된 밭에 파를 심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밭을 보았을 때는 그다지 넓어 보이지 않아 편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낮 시간 내내 다른 집으로 이동해서 배 봉지를 싸고 돌아와 보니, 파를 절반도 심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못했던 사태에 다른 일을 하던 팀도 모두 파밭으로 모여들어 파 심기를 도왔다. 비록 그날, 파 심는 일을 모두 끝마치지는 못했지만 함께 일을 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어 매우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로소 많은 선배들이 농활을 왜 그렇게도 좋아하고, 꼭 가봐야 한다며 권유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단순히 농사일을 돕는 의무적인 봉사활동에만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닌,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봉사활동, 일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자세, 생각 없이 지나쳤던 작은 것들에 얼마나 많은 정성과 시간이 투자되어 만들어지는지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바로 농촌봉사활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엔 단순히 의무화되어 있는 봉사활동에 대한 부담과 이야기로만 들었던 재미있는 농활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참여했었다. 하지만 일주일간 농활을 하면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서로에게 많은 정을 느꼈고, 도움을 받는 장학생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내게 어떤 의미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내 인생의 밭을 매고 돌아온 일주일이었다.
최노욱·성균관대학교 3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