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바로가기 좌측메뉴바로가기 본문바로가기

아산상

  • 시상명 : 아산상
  • 년도 : 2022
  • 부문 : 의료봉사상
  • 소속(직위) : 국립소록도병원 의료부장
  • 수상자(단체) : 오동찬

소록도의 상처받은 주민들을 돌봅니다

 

전라남도 고흥군에 위치한 소록도는 이름처럼 섬 모양이 어린 사슴을 닮았다.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을 품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한센병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이주당한 6,000여 명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다. 100년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사회로부터 소외된 소록도 주민 420여 명이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고 있다.

 

국립소록도병원 오동찬(54) 의료부장은 소록도 주민들에게 “오 선생”이라 불린다. 의사로서 아플 때 주민들을 치료도 해주지만, 슬플 때나 기쁠 때 함께 울고 웃는 가족 같은 사이다. 평균 연령 80세에 이르는 소록도 주민들에게 오동찬 의료부장은 27년 세월 동안 아들 같은 이웃으로 살아왔다. 질병의 고통을 넘어 사회적 편견과 차별로 힘들어하는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큰 힘이 되어 왔다.

 

치료할 환자가 많아 떠날 수 없었다

 

                           <소록도 주민 집을 방문해 담소를 나누는 오동찬 의료부장>

 

오동찬 의료부장은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재학 당시 소록도 분교로 보이스카우트 캠프를 간 아버지를 도와주러 갔다가 소록도의 역사와 한센병에 대해 알게 되었다.

 

소록도의 아픈 역사를 접하고 사회적 편견과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을 만난 후, 기회가 된다면 의사로서 이들을 돕기로 결심했다.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구강외과 인턴 수련을 마친 후 모두가 기피하는 국립소록도병원 공중보건의를 지원했다. 한센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선·후배는 말할 것도 없이 가족 모두의 반대가 심했지만, 오동찬 의료부장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공중보건의 근무를 시작한 1995년만 해도 소록도에는 1,400여 명의 주민들이 있었고, 이들 대부분은 한센병 후유증으로 손가락이 없어 양치질을 제대로 하지 못해 구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동찬 의료부장은 주민들의 입 안을 치료하고 구강암 환자들을 돌보며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냈다. 점심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정도로 바쁜 일상이었지만, 진료가 끝나면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며 도울 일을 찾아다녔다.

 

“연세가 많은 어르신 집에 가서 청소도 해드리고, 농기구를 옮기며 일손을 도왔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함께 밥도 먹고요. 외롭고 상처받은 이야기를 곁에서 들어주는 것 자체가 이분들께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동찬 의료부장은 공중보건의 월급을 모아 주민들에게 전동칫솔도 사서 나누고, 틀니를 제작해 전달하기도 했다. 당시 공중보건의 대부분이 1년만 근무하고 소록도를 떠났기에 정을 주지 않으려던 주민들도 오동찬 의료부장의 진심을 알고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공중보건의 1년 근무를 마칠 즈음 함께 근무를 시작했던 동료들은 다른 지역으로 근무지 이전을 신청했지만, 오동찬 의료부장은 치료가 필요한 많은 환자를 두고 차마 소록도를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3년의 복무기간을 소록도에서 채웠다. 공중보건의를 마친 후 대학 병원과 개원 병원 등 여러 곳에서 좋은 제안이 있었지만, 모두 사양하고 또다시 국립소록도병원 의무 사무관에 지원했다.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 소록도라 여겼기 때문이다.

 

한센병 후유증 환자를 위한 ‘아랫입술 재건 수술법’ 개발

 

                                        <소록도 주민을 진료하는 오동찬 의료부장>

 

오동찬 의료부장이 공중보건의로 근무할 당시, 소록도의 많은 주민들이 한센병 후유증으로 아랫입술이 처져 있었다. 식사 때는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하고 평소 벌어진 입 사이로 침이 흘러내렸다. 입안이 노출돼 구강건조증도 심했다. 주민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마주하며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관련 교과서나 논문은 없었지만 1960년대 소록도에 의료봉사 온 벨기에 의사들이 비슷한 수술을 했다는 기록에 착안해 연구에 매달렸다. 연구 끝에 주민들을 위한 ‘아랫입술 재건 수술법’을 개발했다. 처진 아랫입술을 끌어올려 복원된 입술은 보기에도 좋았다.

 

“수술받은 어르신들이 식사할 때 밥을 흘리지 않는다고 기뻐했어요. 농담으로 입술만 20대가 된 것 같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죠. 만성질환이 많아 입술 수술까지 받고 싶지 않다던 주민들도 수술한 분들을 보고 너도나도 수술받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500여 명 정도가 이 수술을 받고 새 입술을 되찾게 되었어요.”

 

수술 초기에는 마취부터 수술까지 6~7시간이 걸리는 대수술이었지만 수술 사례가 늘수록 시간도 빨라지고 결과도 더 좋아졌다. 오동찬 의료부장은 환자들에게 새로운 기쁨을 줄 수 있어 힘든 줄도 모르고 그저 신이 나고 행복했다.

 

소록도 주민들은 평범한 우리의 이웃  

 

                      <국립소록도병원 앞에서 주민, 직원들과 함께(오른쪽 세 번째)>

 

과거에는 한센병을 ‘나병’으로 부르며 사회에서 철저히 배척했다. 초기에 발견하면 완치가 가능하지만 이런 편견 때문에 병을 숨길 수밖에 없었고, 병을 키워 치명상을 입은 환자가 적지 않았다.

 

“한센병을 옮기는 나균은 결핵보다 약한 균입니다. 신생아 때 맞는 필수 예방접종인 결핵예방접종(BCG)으로 감염을 막을 수 있고요. 세계보건기구(WHO)는 1980년대 초에 이미 한국을 ‘한센병 완치 국가’로 분류했습니다. 그런데도 소록도 주민들을 향한 잘못된 편견과 차별은 여전합니다. 조부모나 부모가 소록도에 산다고 하면, 자녀나 손주가 파혼을 당하는 것이 현실이죠. 지금도 주민들이 소록도를 벗어나 병원이나 음식점을 이용하려면 주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오동찬 의료부장은 한센병 환자와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도 감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고 싶었다. 소록도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부인을 만나 결혼하고, 두 자녀를 키우며 함께 살아온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온 가족이 한센병에 감염되지 않고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오동찬 의료부장은 여유가 될 때마다 방송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한센병과 한센인, 소록도에 대해 과거 잘못 알려진 선입견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소록도에 사는 주민들은 한때 한센병을 앓아 외모에 후유증이 남아 있을 뿐 지금은 완치된 평범한 우리 이웃입니다. 암이 완치된 사람에게 더 이상 암 환자라고 부르지 않듯, 소록도 주민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선입견을 갖지 않길 바랍니다.”

 

해외 한센병 마을 의료봉사 활동

 

오동찬 의료부장과 가족은 2005년부터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인 2019년까지 매년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몽골 등 해외 한센병 마을을 찾아 의료봉사활동을 해왔다. 소록도병원 간호사 출신인 아내는 진료 보조와 소독을, 장녀는 통역을, 차녀는 의료기구 운반 등을 맡으며 온 가족이 하나의 봉사팀을 이뤘다. 지금까지 무려 30회에 이르는 봉사 경비는 매월 50만 원씩 적금을 넣어 마련하고, 남은 비용은 현지에 기부해왔다.

 

소록도에서 진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란 두 자녀는 현재 한의대와 의대에 다니고 있다. 두 자녀가 졸업하면, 온 가족이 다시 해외 의료봉사를 다닐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오동찬 의료부장은 두 자녀가 남이 힘들 때 위로해주고, 남이 기쁠 때 손뼉치며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은퇴가 6년 정도 남았는데, 그 무렵이 되면 소록도에서 제 역할도 마무리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은퇴 후에는 소록도에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우리나라보다 더 열악한 해외 한센병 마을을 찾아가 봉사를 이어 나갈 계획입니다.”

  • 현재 페이지를 인쇄하기
페이지 처음으로 이동
아산사회복지재단 (05505)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 43길 88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