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상
- 시상명 : 아산상
- 년도 : 2024
- 부문 : 의료봉사상
- 소속(직위) : 요셉의원 원장
- 수상자(단체) : 고영초
가장 낮은 곳에서 실천한 사랑의 봉사
“환자 입원이 가능할까요?” 고영초(71) 요셉의원 원장의 목소리에 초조한 기색이 묻어난다. 인근 병원 응급실과 입원이 가능한 무료진료병원에 문의했지만, 자리가 없어 어렵다는 얘기만 들었다. 환자는 이미 이틀 전 인근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당장 위급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환자가 수술 직후 퇴원하겠다고 억지를 부려 결국 쪽방촌의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수술 부위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깨끗하지 못한 환경에서 생활하면 패혈증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고영초 원장은 직접 환자를 찾아가서 설득했다.
“이곳 영등포 쪽방촌 주민들은 삶의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치료를 잘 받고 낫겠다는 생각보다 그냥 포기해 버리는 거죠. 우리 방문진료팀이 그 환자를 만나러 갔는데 완강하게 거부한다고 해서 ‘그래도 의사 말은 들어주지 않을까’ 싶어 집으로 찾아가 설득했어요. 겨우 입원치료 받겠다고 승낙을 받았으니 얼른 입원할 병원을 찾아야죠.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까요.” 고영초 원장은 수차례 통화 끝에 겨우 한 병원에서 입원 가능하다는 답을 얻어내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전진상의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고영초 원장>
생명을 살리는 의사로, 의사를 낚아오는 어부로
고영초 원장은 어린 시절 사제의 꿈을 품고 일찌감치 사제 양성을 위한 성신중고등학교에 진학했다. 5년간 신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다가 일반 고등학교의 수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고등학교 3학년 편입 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서울대 의대에 진학하며 신부의 길에서 의사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의대를 택한 것은 영혼을 치유하는 신부와 육체를 치료하는 의사가 비슷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고영초 원장은 1973년부터 서울대 의대 가톨릭학생회 활동에 참여해 무의촌 진료활동을 했다.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겪으면서 이를 계기로 신경외과 의사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평생 사제로 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마음의 짐이 되어 우리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 의료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977년 의대를 졸업하면서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무료진료병원인 전진상의원에서 본격적으로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격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의료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무료진료를 하고 사안이 시급할 경우 다른 병원과 연계해 필요한 진료와 수술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전진상의원의 명성이 높아지자 다양한 환자들이 내원하여 의료진도 더 많이 필요하게 됐다. 이에 고영초 원장은 동료 의사들을 봉사자로 인도하고 병원에 소개했다. 전진상의원에서는 고영초 원장에게 ‘의사 낚아오는 어부’라는 별명도 붙여줬다.
<요셉의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고영초 원장>
의료봉사의 활동범위를 넓히다
봉사를 원하는 의사들에게 봉사처를 소개해 주던 일은 고영초 원장의 활동 범위가 넓어지는 계기가 됐다. 전진상의원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고영초 원장이 함께 근무하던 의사에게 자원봉사를 부탁했는데, 얼마 후 그 의사의 요청으로 고영초 원장은 1987년 노숙인과 쪽방촌 주민을 위한 무료진료병원인 요셉의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997년에는 이주노동자를 돕는 라파엘클리닉과 인연을 맺게 되어 2022년까지 매달 빠짐없이 이주노동자 무료진료에 참여했다.
고영초 원장은 2023년 요셉의원 원장으로 취임할 때까지 세 곳에서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해왔다. 또 그의 권유로 봉사를 시작해 꾸준히 의료봉사를 펼치는 의사가 50여 명에 달한다.
“제가 봉사를 권유한 여러 분이 기꺼이 참여해 주셨는데 지금까지도 봉사를 계속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기쁩니다. 저와 비슷하게 봉사를 시작한 분들이 아직도 계속하시는 걸 보면 의사는 어떤 직업보다 봉사하기 좋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또 하나의 직업이라기보다는 성직자만큼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신부가 되지 않고 의사가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의료봉사의 가치를 전하다
고영초 원장은 스스로 봉사활동에 참여한 것뿐 아니라 봉사활동의 가치 확산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2006년 건국대학교 의과대학에 사회의학 강좌를 정식 수업으로 개설했다. 의료봉사를 정식으로 다룬 강좌로 ‘어떻게 하면 행복한 의사가 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의료윤리와 존엄사, 사회의료운동 등을 다뤘다. 특히 봉사하는 기쁨을 전하는 데 중점을 두고 국내외 봉사단체의 활동을 소개하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봉사자를 강사로 초청했다. 한국 최초의 사제 겸 의사인 김중호 신부, 케냐의 어머니로 불리는 유루치아 수녀, 전진상의원 배현정 원장, 요셉의원 설립자 故 선우경식 원장, ‘울지마 톤즈’로 이태석 신부를 소개한 구수한 PD 등의 강연으로 학생들에게 의료봉사의 동기를 부여했다.
또 학생들이 요셉의원, 전진상의원, 라파엘클리닉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 학년의 절반이 봉사활동에 참여할 정도로 학생들의 반응이 좋아지자, 고영초 원장은 학생들과 병원 직원들로 구성된 봉사단을 만들었다.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봉사동아리 ‘감사’는 지금도 라파엘클리닉에서 활동하고 있다.
<라파엘클리닉 봉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고영초 원장(가운데)>
요셉의원 원장으로 제2의 의료봉사
건국대학교병원 자문교수로 재직하던 고영초 원장은 은퇴를 준비하고 있던 2022년 10월 요셉의원 원장직을 제의받았다. “요셉의원은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해온 곳이기도 하지만, 초대 원장인 선우경식 원장님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어요. 돌아가신 원장님이 불러주셨다는 생각이 들어 기쁘게 원장직을 수락했지요.”
2023년 3월 요셉의원 제5대 병원장으로 취임한 후 요셉의원의 유일한 상주 의사로 주 4일 오후에는 신경과와 신경외과 환자 등을 진료하고 원장 업무도 병행하고 있다. 더불어 안과의사인 둘째 아들도 요셉의원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
현재 고영초 원장은 방문진료를 활성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쪽방촌에는 고령이나 거동 불편 환자가 많아 찾아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2023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쪽방촌 방문진료는 고영초 원장 외에 간호사, 사회복지사, 약사로 구성되었고, 위급한 상황을 대비해 청년 봉사자가 동행한다. 초기에는 의료진을 피하거나 화를 내는 환자들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고영초 원장이 지속적으로 방문해 얼굴을 알리자 환자들도 도움을 주는 의사로 인식하고 진료에 응하고 있다.
고영초 원장은 “신경외과 의사로 수술장에서의 보람 못지않게 봉사 현장에 있을 때 큰 기쁨을 느낀다”고 말한다. 선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쪽방촌에서 방문지료하는 고영초 원장(가운데)과 의료진>